진시황의 선택, 그 후

춘추전국시대 (770~221 BC)의 주요 사상으로 꼭 거론되는 사상들에는 유가, 도가, 법가, 묵가 등이 있다.  오늘은, 그 중에서도 유가와 법가에 대해 쓰고자 한다. 한 나라의 왕이 어떻게 사회 질서를 확립해야 하냐는 질문에, 유가와 법가는 완벽하게 대치된 주장을 펼친다. 

유교는 법을 기껏해봐야 "필요악" 정도로 여겼다.  현재 사회가 어지러운 것은 사람들이 "예"를 확립하지 못해서라고 생각했던 그들은 사람들에게 "예"를 가르치는 것이 진정한 해결책이고, 강제성을 가진 법은 임시방편일 뿐이라고 믿었다.  문제는 "예" 가 체계적으로 확립된 것이 아니라, 관습에 더 가까웠다는 것이다.  성선설을 믿었던 유교에서, "예"는 "사람이 착한 본성을 가지고 직관적으로 판단했을 때 옳은 행동" 정도로 아주 느슨하게 정의되어 있었다. 

반면, 법가 사상은 영토 확장, 권력 유지가 유일한 목표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법은 인권이나 경제, 종교적인 의미를 내포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사람들을 복종시키게 만드는 수단에 불과했다.  그렇다고 이들이 권력과 피에 목마른 폭군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어느 정도는 강력한 정부가 나라의 안정과 질서를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유교의 주장
1. 성선설 (인간은 본성이 착하다)
2. 선한 ("예"를 지키는) 군주만이 백성의 지지와 사랑을 얻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강제성이 따르는 법은 폭군을 위한 것이다.
3. "예"는 오래전부터 현자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다듬어진 것이며, 이 세상의 이치와 인간의 본성과 조화를 이루는 조항들이다.  정치적인 목적만을 위해 만들어진 법과는 다른 점이다.
4. "예"는 부모와 자식, 부부, 친구, 왕과 신하 등 다양한 인간관계를 존중하는데 법은 그렇지 못하다.
5. "예"에는 미적이고 시적인 부분이 있다.  인간의 감정적인 면을 반영한다.
6. "예"는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유연성이 있어서, 언제나 같은 잣대만을 들이대는 법보다 우수하다.
7, 법은 법을 만든 사람보다 뛰어나지 못한데, 법이 사람 위에 군림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법가의 주장

1. 대부분의 사람은 이기적이기 때문에, 엄격한 처벌이 필요하다. 
2. 군주는 당파 싸움과 차별대우를 막기 위해 법을 사람의 높낮이에 상관없이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해야 한다.
3. 자기가 멋대로 해석할 수 있는 유교와 달리, 법은 명확하게 군주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직시하게 해준다.  그러므로, 법을 토대로 세워진 나라가 더 안정되고 강할 수 밖에 없다.
4. 생존을 위한 경쟁이 더 치열해지는 역사의 흐름을 유교는 역주행하고 있다.
5. 도덕성에 대한 통일된 정의를 내려 주어야 나라가 부강해진다.
6. 사람은 양심만으로 착하게 행동하지 않기 때문에, 법을 통해 당근과 채찍을 주어야 한다.
7. 법이 훌륭하면, 그 당시 지도자가 능력이 부족해도 법을 따르면 나라가 큰 피해를 받지 않는다.
8. 법이 아주 엄격하면, 사람들이 법을 잘 지킬 것이기 때문에 무거운 형벌을 내릴 일도 오히려 줄어든다.

현대인의 시각에서는 이 두 주장 모두 편협하기 그지없다.  유교에서 주장하는 "선한 정부"는 오늘날의 사회도 지향하는 것이지만, 혈연, 지연을 중시하는 풍토나 지위에 따라 법을 다르게 적용하는 것, 감정적으로 판단 하는 것 등은 오늘날 낙후된 정치 문화의 양상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반면 법가는 모든 이에게 평등하게 적용되는 법을 원했지만 이것은 결국 지도자의 군림을 위해서였지, 정녕 모든 사람들의 행복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유교의 "선한 정부" 를 법가의 평등성과 결합시켰다면, 더욱 진보적인 법치 문화를 형성할 수 있을 터였다.

기원전 221년,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시켰을 때 그는 법가를 통치의 기반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가 사망한 이후, 유교를 지지하는 자들의 힘이 다시 강해지면서 중국의 법은 유가와 법가를 적당히 버무린 새로운 형태로 탄생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이 새로운 법치가 유가와 법가의 단점들만 모아놓았다는 것이다.  법은 철저히 군주가 권력 유지를 위해 백성을 탄압하는 용도로 사용되었고, 더불어 혈연, 지연에 따라 불평등하게 적용되었다. 중국법치 사상의 후퇴는 오늘날까지 그 잔재가 남아있을 정도로 영향력이 거대한 것이었다. 

by 아프리오리 | 2009/08/28 02:08 | 트랙백 | 덧글(0)

대심문관 (The Grand Inquisitor)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중 가장 유명한 장면 중 하나는 단연 "대심문관"이라고 이름 지어진 장이 아닐까? 프로이드가 극찬한 소설인만큼 "대심문관"에 대한 해석도 다양하다. 표면상으로는 로마 가톨릭교의 비판이고, 더 깊이 들어가면 신으로부터 받은 자유의지에 대한 고찰이며, 이 밖에도 다른 사회적, 종교적 또는 철학적 성분이 포함되어 있다.

우선 대심문관의 주장을 살펴보도록 하자.
1. 인간은 크게 두가지로 나눌 수 있다. 가) 자유를 수용할 수 있는 자와 나) 자유를 수용하지 못하는 자. 이에 덧붙여 대심문관은 역사와 자신의 경험에 따르면 전자에 해당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며 인간의 대다수가 후자에 해당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자유를 수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몇 가지 공유하는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의식주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한다는 점, 도덕적인 판단을 하기 위한 책임감을 지기가 불가능하다는 점, 그리고 관습으로부터의 이탈에 대한 배재성이라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자유를 수용할 수 있는지와 없는지를 구분하는 것은 선천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2. 따라서 자유를 수용하지 못하는 인류의 대다수를 위한 인도주의적인 해결책이 필요하다. 자유를 수용하지 못하고 자유에 따르는 책임감을 거부하는 사람들, 즉 자유로부터 구속을 받는 사람들을 위해 대심문관과 같은 사람들이 그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여기서 재밌는 것은 대심문관에 따르면 이 "십자가"가 결코 부담스럽지 않다는 것이다. 사람을 "자유의 구속"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의식주를 제공해주고, 모든이들을 위한 도덕적 판단을 내려주고, 세상의 보편성을 위해 노력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3. 이런 주장을 장황하게 펼친 후 대심문관은 "성자(The Son)"에게 더이상 이 세상에 올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즉, 사람들로 하여금 자유라는 십자가를 지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에 덧붙여 대심문관은 성자의 약점을 꿰둟고 있다고 하는데 바로 여태까지 기록되어진 "신(The God)"의 언행에 벗어나는 언행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대심문관"이라는 장에서 성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포로(captive)라고 표현된다. 그리고 대심문관의 질책이 끝나자 아무 말도 없이 대심문관의 입술을 맞춘다.

이번 포스트에서는 "구속"이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보도록 하겠다. 대심문관에 따르면 세상에는 두가지의 구속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자유를 수용하려면 책임감이 따르므로 "자유의 구속"이 있고, 또 "자유의 구속"으로부터 해방되어 행복을 느끼려면 진정한 자유를 느끼지 못하므로 "행복의 구속"이 있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문제는 평상시에 많이 접하고 들을 수 있는 문제이다. 하지만 조금 더 살펴보면 문제는 복잡해진다. 먼저 "자유의 구속"을 생각해보자. 우선 정말 자유를 수용할 수 있는 사람은 자유를 즐길 것이고, 따라서 "자유의 구속"은 모순적이라고 말할 것이다. 또, "행복의 구속"도 마찬가지이다. 자유에 부담을 느끼는 사람들은 행복을 구속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시 정리하자면 "자유의 구속"이라고 하는 것은 자유를 수용할 수 없는 사람들이 수용할 수 있는 사람들을 보고 하는 말이 되고, "행복의 구속"이라고 하는 것은 반대로 자유를 수용할 수 있는 사람들이 그렇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고 하는 말이다. 즉, 대심문관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구도는 흑백논리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구조에 따르면 대심문관이 주장한대로 보편성을 찾기는 어렵다. 하지만 여태까지 우리가 생각해보지 않은 점이 있다. 바로 자유를 수용할 수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가 과연 "선천적인 성질"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이에 대한 의견은 여러가지 있을수 있지만 필자는 "선천적인 성질"에 의해 사람의 성질이 결정된다는 것이 완벽히 옳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대부분 철학자의 가정은 우리는 "진실"을 추구함으로서 "자유"를 얻을 수 있고 "자유"를 통해 "진실"에 조금 더 가까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자유를 수용하지 못하는 자라도 본인의 결정을 통해 자유를 수용하게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성자(The son)"의 입맞춤은 이 세상을 자유와 진실을 통해 꿀 수 있다는 확신을 나타내는 것이 아닐까?

by 아프리오리 | 2009/08/21 10:30 | Thoughts | 트랙백 | 덧글(0)

인권에 관한 다섯 우화

『자유주의와 식인종』이라는 책으로 유명한 스티븐 룩스(Steven Lukes)는 명백히 자유주의자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흔히 자유주의적이라고 여겨지는 의식과는 무언가 다른 느낌이 든다. 일부 학자들에 따르면 룩스가 주장하는 자유주의는 "계몽된 자유주의," 즉 이성을 바탕으로 상대방과의 대화를 통하여 최적점을 찾아가는 형태를 띄고 있다. 이러한 해석만 보면 소위 말하는 신계몽주의의 일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이번 포스트에서는 룩스의 "인권에 관한 다섯 우화"를 소개하도록 하겠다.

전반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룩스의 주장에 따르면 인권은 보편적이며 그 누구도 인권의 기본적인 원리를 부정할 수는 없다. 이러한 전제조건을 두고 룩스는 두 가지의 질문을 던진다. 첫째, 인권을 수용하지 않는 사회는 어떨까? 둘째, 인권을 심각하게 수용하는 사회는 어떨까?

1. 인권을 수용하지 않는 사회들

가. 공리국 (Utilitaria)
공리주의자들은 말 그대로 "효용(utility)"을 추구한다. 룩스가 말하는 "효용"이란 벤담의 공리주의에 더 가까우며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뜻한다. 또, 경제학에서 볼 수 있듯이 실용은 직선상에 놓여 있어서 "최대의 행복"은 "최소의 불행"과 일치한다.
아무튼 이런 사회에서는 어떤 현상이 벌어질까? "국민의 실용이 법일 것"이다. 따라서 기술관료(technocrat), 행정관료(bureaucrat), 그리고 판사(judge)와 같이 국민의 실용에 관련된 업무를 하는 사람들이 가장 힘이 셀 수밖에 없다. 문제점이 있다면 그 누구도 "효용"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상적인 공리국 국민들은 다른 국민의 행복을 위해서 본인의 행복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있을 것이다.

나. 공동체국 (Communitaria)
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사회이다. 국민들은 공공심이 강하고 집단을 위한 목적을 추구한다. 하지만 단순한 "정"에 의해 뭉쳐진 사회는 아니다. 오히려 공동체국에서는 집단이라는 구성원 없이 개인을 정의하기는 불가능하다. 언젠가부터는 이 공동체국에 이민자들이 많이 들어오면서 공동체국 안에 수많은 작은 공동체들이 생기게 되었다. 흔히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이라고 불리는 형태를 띄게 되었는데 이에 따라 몇 가지 문제들이 생기게 되었다. 첫째로 "포함-배제의 문제(inclusion-exclusion problem)"를 들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어떠한 작은 공동체들이 공동체국의 일부분이 될 수 있을지의 문제이다. 둘째로 "상대주의의 문제 (relativism problem)"를 들 수 있다. 작은 공동체들의 사상이나 행동들이 다른 공동체들과 호환성이 없는 경우이다. 셋째로 "일탈자의 문제 (deviant problem)"를 들 수 있다. 공동체들 간의 갈등을 피하고 싶어서 공동체들로부터 일탈한 존재들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람들이 진정한 공동체국의 국민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다. 프롤레타리아국 (Proletaria)
말 그대로 이상적인 공산주의국가이다. 노동의 분업이 없어졌으며 엥겔즈가 말한대로 사람대신 "사물의 행정 (administration of things)"과 "생산과정의 행위 (conduct of processes of production)"가 지배를 하는 세상이다. 이러한 이상에 따르면 모든 것이 행복해 보이고 사람은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으며 인권이라는 것 자체가 필요하지 않다. 하지만 문제점이 있다면 바로 너무 이상적이라는 것이다.

2. 인권을 심각하게 수용하는 사회들

가. 자유국 (Libertaria)
이 사회에서는 "소유의 권리"를 아주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이 권리는 본인을 소유하는 것부터 시작되며 재능이나 노동 등 자유주의에서 흔히 말하는 자유에 대한 권리르 보장받는다. 또 모두들 평등한 기회를 갖고 있는데, 여기서 "평등한 기회"란 것은 특정한 개인 혹은 집단을 차별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는 의미다. 따라서 어떠한 개인 혹은 집단이 재정적으로 혹은 다른 어떤 방면에서 유리한 입장에 놓여있다면 그것을 존중해야 하며 부의 분배란 찾아볼 수 없다. 다시 말해서 국민들 모두 경주에서 뛸 자격이 주어지는데 승자에게는 승자로서의 자유가 주어지고 패자에게는 패자로서의 자유(?)가 주어지는 사회이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경제적인 자유가 너무 강조된 나머지 양극화가 심해질 것임이 분명하다.

나. 평등국 (Egalitaria)
이 사회에서는 각 일원의 가치를 존중하다. 따라서 기본적인 자유, 법치, 평등한 기회 등이 주어진다. 또한, 모두의 평등을 추구하기 때문에 선천적인 불평등적인 요소들을 없애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가 정말 가능할까? 몇 가지 측면에서 보면 불가능하게 보인다. 첫째로 "자유주의적 제한 (libertarian constraint)"이 있다. 다시 말해서 경제 발전을 위해서 효율을 추구해야 하는데 효율과 평등을 동시에 추구하기란 어렵기 짝이 없다.  둘째로 "공동체주의적 제한(communitarian constraint)"이 있다. 이것은 문화적인 측면에서 부각되는데 각 일원을 존중하면서 동시에 각 일원이 속해 있는 공동체를 존중하기란 어렵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각 공동체가 다른 삶의 방식을 추구하고 있을 때 이 모든 사람들의 평등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 또, 공동체가 개인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 상식이 된 요즘, 공동체와 개인의 존중이 동시에 이루어질 수 있을까?

이러한 사고실험을 한 후 룩스는 평등주의로 눈을 돌린다. 결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사람에 대한 평등한 존중이 있어야만 인권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권의 고원 (plateau of human rights)"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러한 고원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by 아프리오리 | 2009/08/19 16:56 | Thoughts | 트랙백 | 덧글(0)

생태사회주의

생태정치학, 즉 ecopolitics는 상대적으로 어린 학문이다. 물론 서양에서는 조화를 강조하는 동양 사상을 보고 "친환경적"이라고 생각해왔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연구는 아직 미흡하기 짝이 없다. 서양에서도 생태정치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는 걸음마 단계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루소의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말이나 소로우의 은둔적인 삶이 떠오르지만 정확히 인간이 자연과 어떤 관계에 놓여져 있는지, 또 이에 따르는 정치적 그리고 사회적 의미는 무엇인지 깊게 파고든 철학자는 보기 드물다. 1980년대 후반에 미국과 유럽의 많은 젊은이들을 매혹시켰던 녹색정치(green politics)는 학문적 고찰보다는 운동세력의 사상에 가까웠다. (물론 녹색정치를 통해 각국에 녹색당(green party)이 생기고 이러한 당들이 상당한 정치적 힘을 휘둘렀던 것은 사실이다.) 요즘에 들어서야 Robyn EckersleyElizabeth Bomberg, David Schlosberg 등의 학자들이 서양에서 배출되면서 주류에 속하는 자유주의 등을 통해 환경을 해석하려는 노력이 보여지고 있다.

이번 포스트에서는 생태사회주의에 초점을 맞추기로 한다. 물론 녹색정치의 기반이 생태사회주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고, 유력한 녹색당원들 중 생태사회주의에 매혹되어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심지어 맑스주의를 상징하는 빨강과 환경을 상징하는 녹색을 결합해 "수박"이라는 별명까지 생길 정도이다.) 하지만 정치를 떠나 학문으로서의 정치학적인 관점에서 생태사회주의를 바라보았을 때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1) 생태사회주의란

생태사회주의에 대한 논란은 끊이지 않고 있기 때문에 딱 잘라서 정의를 논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합당한 정의를 내리기 위해서는 사회주의와의 연관성을 밝히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다. 우선 사회주의가 생태에 관련된 문제들을 내면화하지 못했던 것은 그 시대에 생태가 쟁점이 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대신 생산의 세가지 요소인 "땅, 노동, 자본" 중 "땅"을 자연과 동등시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 같다. 맑스도 자연(땅)은 지배해야 하는 대상이라고 여긴 것 같고 그 후에 온 사회주의자들 또한 자연(땅)을 지배해야만 경제 발전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한 가닥의 희망을 찾자면 엥겔즈의 "자연변증법"을 꼽을 수 있다. 여기서 엥겔즈는 "우리는 살과 뼈, 머리까지 포함하여 전적으로 자연에 속하는존재이며, 자연의 한가운데에 서있으며, 우리의 자연에 대한 지배의 본질이 모든 다른 피조물보다 우수하게 자연의 법칙을 인식하고이를 올바로 사용할 줄 아는 데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아무튼 1980년대에 등장한 생태사회주의는 사회주의라는 패러다임을 통해 생태를 바라보았고, 이에 따른 결과물은 어느 정도 짐작을 할 수 있다. 바로 자본주의의 모순이 자연을 파괴시킨다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노동력을 착취하고 식민지를 착취하듯이 자연도 착취할 수밖에 없다. 더 나아가 자연을 착취함으로서 자연과 근접한 관계에 있는 농민이나 이민자 또는 여성 등 소수 계층은 더욱 더 불리한 입장에 놓이게 된다.

2) 생태사회주의적 대책

그렇다면 생태사회주의는 어떠한 대안을 제공하고 있는가? 사실 사회주의와 크게 다른 점은 없다. 한편으로는 자급자족을 강조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시장중심주의를 견제한다. 또, 개인소유보다는 공유재산을, 교환가치보다는 사용가치를 중요시한다. 이렇게 보았을 때에는 사회주의와 별 다를 것이 없는 것 같고, 또 그것이 현실일 수도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생태를 보존하는 것이 사회주의를 보존하기 위한 필요조건이라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3) 문제점

가. 우선 생태사회주의에 따르면 자연은 노동력과 비슷하게 착취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자연과 노동력은 몇 가지 다른 점이 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대부분의 자원은 영구적이지 않으며 어떤 형태로든지 고갈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제대로 된 생태사회주의적인 정책이 펼쳐지려면 자연의 착취를 막아야 하는데 그럴 경우에 삶의 질이 급격히 낮아지게 된다. 지속가능한 정도로만 유지하겠다고 해도 석유와 같은 자원은 "지속"될 수 없으며 대체원을 찾아야 한다. 따라서 인간이 이용하는 모든 자원이 지속가능할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 이상적인 꿈인 것 같다.

나. 생태사회주의 뿐만 아니라 생태를 다루는 모든 이론의 문제점 중 하나는 생태와 인간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보느냐에 있다. 인간중심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생태사회주의와 사회주의의 구분은 희미해진다. 다른 점이 있다면 사회주의적 이상을 이루기 위해 자연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주장에 따르면 사회주의적 이상과 관련이 없는 몇몇 형태의 자연파괴는 지속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자면 이론적으로 봤을 때 생태사회주의자들에게 오존층 파괴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것이다. 자연중심적 측면에서 생태사회주의의 "사회주의"적인 면은 두각을 나타내기 힘들게 된다. 자연중심주의는 인간을 자연의 일부분으로 보고, 사회주의적 이상을 통해 자연을 최대한 "자연적"으로 놔두려고 한다.
하지만 "자연적"인 것은 무엇이며 인간이 자연의 수호자가 아닌 일부분으로서 어떠한 역할을 해야하는지 분명치 않다.

4) 결론

이렇게 생태사회주의를 전반적으로 설명하게 되었다. 솔직히 생태사회주의라는 이론 자체는 매력적이다. 환경정의(environmental justice) 측면에서 보았을 때에도 환경파괴는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점들을 동반한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 및 방지하기 위해 환경을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은 귀를 솔깃하게 한다. 하지만 사실상 생태사회주의라는 이론을 따랐을 때 환경이 정말로 개선될 지는 의문이다. 사회주의가 항상 대면해야 했던 "동기부여"의 문제가 가장 돋보인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로 이루어진 사회를 위해서라도 일할 동기를 부여하지 못하는 사회주의 체제에서
환경을 위해 일할 동기를 부여할 수 있을까? 물론 공산주의처럼 붕괴하지는 않겠지만 사상적인 동기 없이는 환경을 위해 일할 동기가 없을 것이고, 사상적인 동기를 부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사회주의는 실패한 이념이 아니며 지금도 사회민주주의 등 여러 가지 형태로 우리 사회에 스며들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복지 측면에서 사회주의는 자유주의에 부족한 부분들을 채워주고 있다. 따라서 환경 문제에 있어서도 사회주의와 자유주의의 공통분모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지구 온난화의 주범인지 아닌지를 떠나서 환경이 파괴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환경을 개선할 수 있는 정치적인 기반을 마련해야 하지 않을까.

by 아프리오리 | 2009/08/18 20:49 | Thoughts | 트랙백 | 덧글(0)

<지구온난화에 속지 마라>를 읽고

  며칠 전 친구의 추천으로 프레드 싱어 (Fred Singer) 의 <지구 온난화에 속지 마라> 라는 책을 읽었다.  한글 번역본은 8월 5일에 출간된 따끈따끈한 책이지만, 영문으로는 무려 3년 전에 출판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며칠 사이에 경향신문과 중앙일보에 소개 되는 등 우리나라에서 꽤 관심을 끌고 있다. 그만큼 한국에서는 아직 그의 아이디어가 신선하고 파격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뜻이다.

  Singer의 주장은 한마디로 말해서 지구온난화가 진행되고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인간이 배출하는 이산화탄소 때문이 아니라 자연적 기후 변동 현상의 하나라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인류가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고 방관하고 있어도 된다는 주장을 펼치려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석유는 곧 고갈될 것이고, 대체 에너지를 찾는 일은 여전히 시급하다.  다만, 불가피한 자연 현상을 막으려고 노력하느니, 어차피 일어날 기후 변화를 어떻게 긍정적으로 이용하느냐를 연구하는게 중요하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이 책을 읽는 어떤 사람들은 더이상 지구온난화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홀가분해질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이려면 어떤 국가든지 뼈를 깎는 고통을 감수해야 하고, 우리나라도 요즘들어 "녹색성장"을 부쩍 자주 거론하는 상황이니 말이다.  한편 평소에 지구온난화에 많은 관심과 우려를 가져온 사람이라면 이 이론이 앨고어의 "불편한 진실"보다도 불편하게 느껴질 것이다.  평소에 도덕적 책임감을 느껴온 일이 내 책임이 아니라니, 갑자기 부도덕해지는 것같은 기분도 들고 말이다. (적어도 필자는 그렇게 느꼈다.)

  하지만 지구온난화에 대한 주장이 나에게 홀가분하냐 불편하냐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구온난화를 둘러싼 다음 세가지 의문에 대한 진실 뿐이다:

1. 지구온난화는 실제로 진행되고 있는가?
2. 진행되고 있다면 인류의 책임이 큰가?
3. 지구온난화가 지속되면 커다란 문제가 되는가?

 진실은 하나 뿐이지만, 현재로서는 여러가지 주장들이 공존하고 있다. 전 세계 대부분의 환경/기후 학자들은 위의 세 질문에 모두 YES 라고 대답한다.  Singer처럼 2나 3에 NO라고 대답하는 소수의 과학자들이 있고, 더욱 적지만 1에 NO라고 대답하는 사람들도 있다. 문제는 쟁점이 "진실"과는 점점 멀어지고, 오히려 정치나 경제적 이슈에만 치중한다는 것이다. 내가 논박하지 않은 반대론이 있는 한 내 의견은 절대적인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Singer를 비롯한 많은 환경학자들은 다른이의 예측이 더 옳을 가능성은 철저하게 배제하고 있다. 과학적인 증거보다는 반대쪽의 도덕성에 대한 공격으로 승부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지구온난화에 경각심을 느껴야 한다고 하는 과학자들은 Singer쪽 사람들을 공격하기에 좀더 쉬운 입지에 있다.  Singer의 책이 서점에서 더 잘 팔릴지는 몰라도, 과학계 내에서는 자기네들의 숫자가 훨씬 우세하기 때문이다.  또한, Singer처럼 지구온난화가 자연현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석유회사와 뒷거래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받기 딱 좋다.  (실제로 Singer는 GE, GM, Ford, Exxon Mobil, Sun Oil, Shell등의 자동차 및 석유회사들의 컨설턴트로 지낸바 있다.)  저탄소 운동이 본격화되면, 가장 타격을 받는 곳은 당연히 석유와 자동차 기업들이다. 그래서 대기업들이 몇몇 과학자들을 고용해서 지구온난화에 대한 당연한 사실을 아직 의문이 남은것처럼 꾸미고 소비자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냐는 추론도 꾸준히 들려온다.  저탄소운동을 뒤로 늦추고 지구온난화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수록 이런 기업들의 이익은 증가하기 때문이다. 미국내에서 석유/자동차업계의 막강한 권력을 고려한다면 그리 허무맹랑한 생각도 아닌 것 같긴 하다.

  반면, 싱어같은 반대론자들에게도 작게나마 반격의 여지는 있다.  만약 지구온난화를 빌미로 전세계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제한한다면, 상대적으로 녹색산업을 많이 추진해온 선진국들에게는 타격이 적지만, 중국 및 대부분의 개발도상국들에게는 사형선고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중국같은 나라들이 자꾸 차고 올라오는 시점에서, 선진국들이 자기 입지를 굳히기 위한 빌미로 "지구온난화 히스테리"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도 가끔 제기된다.  

  기후관련 지식이 전무한 나에게는 양측 의견 모두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어 보였다.  결론적으로는, Singer가 훨씬 도덕성 면에서만큼은 입지가 약하다.  하지만 정말 극단적으로 생각해서, Singer가 정말로 석유 기업들과 한패라고 해도, 그의 책이 사회에 꼭 해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만일 Singer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당연히 인류의 대처 방안이 바뀌어야 하기 때문에 중요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만약 Singer의 주장이 거짓이라 해도, 다른 과학자들은 Singer를 논박할 수 있는 정당한 과학적 근거를 찾는 과정에서 자신의 주장이 더욱 굳건해져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것이다.  

  흔히 사람은 자신이 도덕과 정의의 편에 섰을 때 "무오류의 독단"에 빠지기 쉽다.  John Stuart Mill의 <자유론>에서 자세히 다루어지는 "무오류의 독단"이란, 자기 생각을 뒷받침할 필요나 반대론은 제대로 고려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는 나태한 상태이다.  무오류의 독단 때문에 소크라테스나 갈릴레오같은 사람들은 진리 탐구에 고난을 겪었고, 과거에 수많은 사람들이 종교에 이의를 제기했다가 핍박을 받았다.  그때보다 더 개방적인 오늘날의 사회에서도 무오류의 독단은 계속된다.  Singer가 이 시대의 소크라테스든 거짓말쟁이든, 그는 자유토론의 자연스러운 산물임은 확실하며, 그의 생각은 최소한의 존중을 받을 가치는 있다.  그의 연구가 설사 "이기심"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여도, 사실을 배우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면 말이다.

by 아프리오리 | 2009/08/16 22:41 | Thoughts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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